무소속으로 세 번 당선

박우량 신안군수

신안군수에 네 번이나 당선된 것도 놀라운데 어떻게 세 번이나 무소속으로 출마할 결심을 하셨어요

공무원 생활 10년 남겨두고 2006년 사표까지 내면서 무소속으로 하남시장에 출마했었어요. 아내가 공무원 그만두면 아이들도 어린데 어떡하냐고 극구 반대했지만, 하남시에 대한 꿈이 있어 설득하여 나간 것인데 보기 좋게 떨어졌죠. 아내도 아이들도 고생했다 싶어 유럽 여행을 떠났어요. 여행 중 신안에서 온갖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오는 거예요. 저보고 신안군수 보궐선거가 있으니 나가보라며 난리가 났죠. 당시 고길호 씨가 당선이 됐는데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가 된 거였어요. 근데 정작 가족들도, 하남 분들도 신안으로 가는 걸 다 반대하는 거예요. “하남에서 일궈놓은 게 있으니 다음 선거에 출마하면 되는데 왜 하필 시골로 가려고 하느냐. 시골 가서 공천 못 받으면 그때는 다시 하남으로 오지도 못할 거다”

작은 섬에는 공무원들 가지 않았지만 나는 직접 찾아가 그 섬사람들에게서 압도적 지지표 나와

고민 끝에 고향인 신안으로 내려갔어요. 그런데 막상 내려갔더니 민주당 공천을 안 주겠다는 거예요. “너도 나도 도초 사람인데 다 해먹으면 되겠냐” 그러면서… 신안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라 민주당 파워가 막강했거든요. 순간 ‘신안은 인구 소멸 지역 대상 1위가 아닌가. 특히 흑산도는 1년에 110일을 배가 못 들어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열악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신안 사람들 가슴 속에는 ‘내가 돈 많고 성공했으면 여기 살겠냐’는 상대적 박탈감이 있는 거예요.
내가 이 고향 사람들한테 자긍심과 꿈을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공천 받고 안 받고가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선도 수선화 축제장을 둘러보며
무소속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는데 비결이 무엇이었나요

제가 만 18세 때 전라남도에서 7급 공무원에 합격했어요. 그 덕에 신안군청, 섬 면사무소, 내무과, 갯바위권 등 다양한 지역에서 근무할 수 있었죠. 당시 가뭄이 들어 물이 없으면 모래땅을 깊이 파서 나오는 민물을 식용수로 썼어요. 동네 사람들을 도와 모래땅도 같이 파고 그분들 어려운 얘기도 들어주곤 했었죠. 그때 정부가 농업 진흥을 위해 보리 수매를 했었어요. 그런데 증도 같이 보리 수매가 더 필요한 작은 섬에는 정작 공무원들이 가지를 않는 거예요. 그 섬에 가려면 배를 몇 번 갈아 타서 들어가야 하니 공무원들이 누가 가려고 하겠어요. 하지만 저는 직접 보리 수매하러 그 섬사람들한테 갔어요. 눈 펄펄 내리는 겨울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 작은 섬까지 가서 지역 주민들을 만났죠. 그 섬 주민들을 만나러 갔더니 그분들이 그 옛날 제가 보리 수매했던 걸 여지껏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섬들에서 압도적인 지지표가 나왔어요.

당선 후 바로 해수부령 바꿔달라했지만 거절 당해 오죽하면 ‘한국 배 사지 말라’ 광고 하겠다 협박도

게다가 제가 내무부에서 30년간 열심히 일하고 또 3개월 전 하남에서 선거를 워낙 치열하게 했던 터라 완전히 선거의 프로가 되어있었던 거예요.웃음 그러니 시골 선거만 치른 후보자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 거죠. 정책이라든지 스피치라든지. 보통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하면 도지사부터 군의원까지 나오니까 누가 어떤 공약을 하는지도 헷갈려요. 근데 그때는 보궐선거라 군수 하나만 딱 나오니 사람들이 제 공약 내용에 집중을 하는 거예요. 그때 제가 제1공약으로 내건 것이 “내가 군수가 되면 6개월 만에 밤에 배를 띄우겠다”였어요.

밤에는 배를 띄울 수 없었나 봐요

밤에 배를 띄우겠다고 하니깐 섬사람들이 하나같이 욕을 해요. “김대중 대통령도 밤에 배를 못 띄웠다. 어떻게 군수 나부랭이가 밤에 배를 띄운다는 거야?” 주민들이 간절히 바랐던 일이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시 TV 토론회에 군수 후보 여섯 명이 나왔는데 전부 저한테만 질문 공격을 하는 거예요. TV가 저만 비추더라고요.웃음 근데 그 후보들 질문에 제가 대답을 못 할 리가 있겠어요? 밤에 배 띄우는 정책도 “이건 해수부 훈령이기 때문에 해수부 장관 만나서 담판을 지으면 바꿀 수 있다” 했죠. 그러니까 주민들이 “젊은 친구가 뭘 좀 아네”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 6%였던 제 지지율이 토론회부터 급상승하더라고요.

보궐선거 당선 다음 날 바로 목포 해양항만청장을 찾아가 야간에 배가 다닐 수 있도록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어요. 며칠 뒤 바로 해수부 국장과 차관을 찾아갔지만 다들 “그거 안 됩니다” 딱 잘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오죽하면 이렇게 협박도 해봤어요. “내가 워싱턴 포스트에 한국 배 사지 말라고 광고를 내겠다. 우리나라가 조선업 1등국이라고 하는데 목포에서 바로 코앞의 신안 작은 섬에 가는 배도 밤에 못 띄우면서 저 큰 바다로 나가는 배를 어떻게 판단 말이냐” 그래도 차관이 “광고하려면 하세요” 하며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주민들한테 당선 후 6개월 만에 배 띄운다고 큰소리쳤는데 아주 절망적이었어요.

퇴근 후에도 밤마다 계속 고민하는데 방법이 보이질 않아요. 근데 마침 노무현 대통령이 서남지역 의원들과 중앙 6개 부처 장관을 모아 연석회의를 연다는 공문이 왔어요. 공문을 받고 나서 새벽에 잠자다가 박수를 치면서 벌떡 일어났어요. ‘그래,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서 공약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 그 새벽에 갑자기 흥분을 하니 아내가 놀래가지고 “당신 미쳤냐”고 그럴 정도였죠.

노 대통령한테 “통금 없앤 지 20년인데 신안은 오후 4시 반 통금입니다” 대통령도 이게 뭔 소린가

청와대 연석회의 날 다른 분들 건의 사항은 결국 돈 달라는 것이더라고요. 저는 돈 달라는 소리는 한마디도 안 했어요. 노 대통령한테 “대통령님, 통금 없어진 지가 20년이 넘었습니다. 근데 우리 신안은 통금이 오후 4시 반부터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도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은 얼굴이에요. “해수부 규정이 ‘모든 여객선은 일출 전 30분부터 일몰 후 30분까지만 운영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후 4시 반에 신안 군청에서 출발해야 도초 갔다가 다시 일몰 후 30분 안에 겨우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제도가 바뀌어야 섬사람들 생활이 나아집니다”

신안 군수기 생활체육대회

대통령 입장에서도 돈 달라는 소리 안 하고 제도만 바꿔달라니깐 얼마나 좋겠어요. 대통령이 듣자마자 해수부 차관에게 “그거 배 다니게 해주면 안 되나?” 그랬더니 안전 때문에 좀 힘들다고 답변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대통령이 “안전 보강해서 하면 되잖소” 그렇게 지시를 해요. 회의가 끝나고 “차관님, 이거 오늘 건의해서 죄송합니다” 그랬더니 차관이 대뜸 “아니 나한테 먼저 얘기했으면 내가 해결해 줄 텐데 대통령한테까지 건의하냐” 그러는 거예요. 그 소리 듣는 순간 속으로 ‘이 사람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예전에 분명 차관실에까지 가서 논의를 했잖아요.

우리 섬에도 배가!

한 달쯤 지났는데도 해수부 훈령을 바꾸질 않는 거예요. 마침 대통령이 회의 결과 논의를 위해 목포대학에 오셔서 식사를 같이하게 됐어요. 저는 밥도 안 먹고 대통령 식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다시 건의했어요. “야간에 섬에 배가 다니면 우리 섬사람만 혜택 보는 것이 아니라 몇백만의 관광객들에게도 좋아집니다” 그날을 계기로 보름 만에 바로 해수부 훈령이 ‘배 안전에 문제가 있을 때만 통제한다’로 변경됐어요.

그 소식을 듣고 섬사람들이며 선주들이 얼마나 행복해했을까요.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나요?

제가 사무관으로 일하면서 보니깐 지방 자치 시대가 열리겠다는 흐름이 보이더라고요. 지방자치에 앞서가려면 일본 유학을 가야겠다 생각했어요. 당시 일본은 우리보다 한 100년은 앞서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92년 오사카 대학의 지방자치 법학 석사과정을 밟게 됐어요. 석사과정 2년 6개월의 삶이 제가 지금 군수를 잘할 수 있게 된 밑바탕이 되었죠. 거기 가서 보니 도시라고 하는 것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되어야 되겠구나 방향이 서더라고요.

시코쿠’ 섬 식당 주인이 밤에도 배가 다닌다고 “우리나라 섬은 밤에 배가 안 다니는데!”

한번은 오사카 앞에 있는 ‘시코쿠’ 섬에 가족들과 놀러 갔어요. 저녁 먹다 보니 어느새 밖이 어두워요. 제가 아이들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했더니 식당 주인이 “걱정 마세요. 밤에도 배가 있어요” 깜짝 놀라 재차 물었던 기억이 있어요. 바닷가에 가보니 밤 12시 이후에도 4시간 간격으로 배가 다니는 거예요. 그 바닷가에 앉아서 “시코쿠 섬에서처럼 우리 섬에도 밤에 배가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어요. 그렇게 혼자 상상하고 꿈꾸었던 것들이 제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거죠. 그렇게 간절하게 꿈꿨던 것들이 조금씩 실현되더라고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좋은 꿈을 꾼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우량 신안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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