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윤학

“왜 시민들이 저런 짓을 할까?” 웅성거리는 군중 속에서 안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하얀 칼라가 선명한 교복 차림의 여고생 두 명이 보였다. 그들의 눈길을 따라가 보니 MBC 방송국 건물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방송국 옆이 바로 병원인데 입원환자들 어떡해?” 소녀들은 울먹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군중들은 그간 거짓과 왜곡으로 진실을 가려왔던 방송국에 저주만 퍼붓고 있었다. “MBC는 불살라 버려야 혀!” 그 틈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또다시 여고생들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자들 다 타죽게 생겼네!”
그건 내게 뭔가를 하라는 명령처럼 들렸다. 곧바로 방송국을 향해 달렸다. 눈에 소화전이 들어왔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었지만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져나왔다. 불길을 향해 물을 뿜어댔지만 물줄기는 불길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흩어졌다.
도저히 불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환자부터 살려야 한다! 병원으로 뛰어갔더니 간호사 두 명이 막아섰다. “환자들 대피시켜요! MBC에 불이 났어요!” 나는 힘껏 외쳤다.
“오늘 아침에 모두 대피했어요” 차분한 그녀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금방 불이 났는데 아침에 모두 대피했다고?’ 그녀들을 밀치고 계단을 뛰어올라 입원실을 확인하니 정말 아무도 없었다.
순간 의문이 밀려왔다. ‘분노한 시민이 우발적으로 불을 질렀다면 환자를 미리 대피시킬 수 있었을까?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가려는 계획된 방화가 아닐까?’ 끊임없이 의문이 스쳐 갔다.
당시 국민들은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왜곡 보도를 그대로 믿고 있었다. 여기에 방송국 화재까지 겹치면 “전라도 놈들이 일을 저질렀다”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고, 전두환은 그것을 내란 종식의 명분으로 삼아 권력 탈취의 발판으로 이어갈 터였다. 혼란이 격렬해질수록 광주는 고립될 것이었다.
그러나 거리의 시민들은 군인들과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었다.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 시민들이 군인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평화로운 시위를 하도록 하자’ 목표가 서자 길이 보였다.
마침, 확성기를 든 두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확성기로 시민들을 한데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두 여인은 순순히 따라주었고 지프차 운전자가 확성기를 차에 매달아 주었다.
어둠 속에서 ‘환자들 다 타죽게 생겼네!’ 여고생들의 애타는 목소리 그건 내게 뭔가를 하라는 명령처럼 들려
나는 지프에 올라타 확성기를 잡고 도청 앞 군인들을 향해 돌진하는 버스에 대고 호소했다. “군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그들도 전두환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평화로운 시위로 우리의 뜻을 알립시다!” 놀랍게도 버스 기사들이 모두 따라주었다.
나는 버스에 1호차, 2호차… 번호를 붙인 뒤 10여 대의 버스 대열을 이끌고 도청 앞으로 나아갔다. 군인들을 향해 외쳤다. “광주 시민은 여러분의 적이 아닙니다. 시민도 군인도 모두 전두환의 정권 놀이 피해자일 뿐입니다. 평화롭게 시위할 테니 물러나 주십시오” 그러자 최루탄을 쏘아대던 군인들도 당황해하더니 더 이상 최루탄을 쏘지 않았다.
나는 선두에서 구호를 외치며 버스 대열을 시내 한복판으로 향하도록 했다. 두려워 떨고 있던 시민들이 한밤중임에도 하나둘 거리로 나왔다. 곧 수만 명의 시민이 버스를 따라 평화로운 시위를 이어갔다. 그 밤 시민들의 걸음걸이에는 헛된 죽음을 막아내고 있다는 뿌듯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그 시위는 질서 있게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날의 평화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환자들을 걱정하며 애타게 외치던 앳된 여학생들의 마음이 내 가슴에 불을 지폈던 것이다. 시민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함께해준 것이었다.
그날 밤 내게 “너를 왜 따라야 해?” 하고 묻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폭력으로 얼룩진 광주에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라는 것을 누구나 가슴 깊이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진보와 보수로 갈려 또다시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쪽은 저쪽을 ‘내란범’, 저쪽은 이쪽을 ‘계엄 유발범’이라고 증오한다. 광주에서 군인과 시민이 서로를 적대하며 증오했던 것처럼.
전두환은 군인을 쏟아부어 광주 시민들을 분노케 만들고, 시민들로 하여금 군인을 적으로 여기게 했다. 그리고 진압을 명분으로 정권을 잡았다. 증오해야 할 대상은 정권을 탈취하려는 전두환이었는데…
군인도 시민도 모두 우리 국민이었듯, 지금의 진보와 보수도 모두 우리 국민일 뿐이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적대감을 키우면 키울수록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가고, 이득은 전두환처럼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슬픈 것은 그 피해가 크면 클수록 그들의 권력에 응집력이 생겨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랬듯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서로 갈라진 국민이 아니라, 분열을 이용해 권력을 키우려는 정치 세력이다. 당시 군인들과 시민들이 서로 더 격렬하게 싸워야 정의로운 줄 알았듯이 오늘 진보와 보수도 서로를 더 맹렬하게 물고 뜯어야 정의롭다고 믿고 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이념보다 앞에 두는 한 사람 있다면! 진보, 보수로 갈린 국민들도 가슴 속 평화를 꺼내…
그런데 나는 광주에서 희망을 보았다. 두 여학생의 안타까운 그 외침! 내 편에도 네 편에도 속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뿜어내던 그 소리! 나는 그 가냘픈 목소리에서 길을 찾았고 아무 힘도 없는 내가 그 엄청난 일에 뛰어든 것이다. 그날 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던 평화의 시위는 두 여학생의 사람에 대한 근원적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도 나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진보나 보수의 이념보다 앞에 두는 그 누군가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평화의 길은 그 어디서건 반드시 열릴 것이다.
진보로, 보수로 갈려 싸움에 뛰어든 국민들도 그들의 가슴 속에 고이 묻어둔 평화를 꺼낼 것이다. 그 도도한 물결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 대단했던 권력자 전두환도 그 물결에 휩쓸려 가는 걸 우리 모두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평화의 불씨는 대통령이나 여야 대표, 대법원장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서 타올라 번져간다.
우리 모두 광주의 그 두 여학생처럼 그런 평화의 불씨를 만들어 보자!
발행인 윤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