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윤학
청담동 한강 뷰가 보이는 빌라에 초대받았다. 시가가 무려 200억대라는 뉴스를 본 적이 있어 그런 고급빌라는 얼마나 좋을까 무척 궁금했다. 빠릿빠릿한 젊은 경비가 안내하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집에 들어서니 탁 트인 창문으로 한강이 펼쳐지고 멀리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와 멋있다!’ 널따란 거실, 외국 영화에서 보았던 고급 주방, 예술품 같은 탁자와 소파… 주인의 안내로 들어선 안방이며 화장실 디자인도 최고급이다. 외국의 건축 거장이 지었다는 소문대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멋진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뭔가 답답했다. 실내공기가 탁해 나도 모르게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아! 창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 소음, 한강 변 올림픽도로를 셀 수도 없는 차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이런 소음과 분진을 날마다 옆에 두고 어찌 산다는 말인가! 창문을 한참 열지 않았는지 창틀에는 묵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한강 뷰의 이 비싼 집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꿈꾸고 있는가! 한강 변을 따라 줄줄이 서 있는 60억, 백억, 2백억… TV와 신문도 한강 뷰라는 파노라마 그림을 뇌리에 심어주어 한강 뷰 아파트에 살지 못하면 뭔가 부족한 듯 스스로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런데 서울의 최고급 한강 뷰 빌라가 이 지경이라면 그 꿈이 너무나 허망하지 않은가.
지금껏 우리는 빈부격차를 약속이라도 한 듯 돈이나 집값으로만 갈라왔다. 그러나 수백억 집에 사는 사람의 삶의 질이 이 모양이라면! 창문을 열면 소음과 먼지가 쏟아져 들어와 창문도 못 여는 집에서 사는 사람이 부자일까, 아름다운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창만 열면 상큼한 공기가 들어오는 집에서 사는 사람이 부자일까? 놀라운 것은 그 소음과 분진으로 삶의 질이 낮아져도 언론에서 떠들어대고 한강 뷰만 보이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삶의 질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
십오 년 전 뉴욕 맨해튼 부호의 저택에 가본 적이 있다. 창밖으로는 센트럴파크가 보이고 한적한 시골에 온 듯 풀 내음이 집안을 감싸고 있었다. 상큼한 공기, 햇살 가득 들어오는 창, 소음 없는 그곳에서 그야말로 부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이 그런 집을 택한 것은 돈이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삶의 질과 주거환경에 대한 문화적 안목 때문일 것이다. 뉴요커들도 세계 최악이라는 교통체증을 고려할 때 센트럴파크에 큼지막한 도로를 내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먹고 자고 생각하는 주거 공간의 쾌적함이야말로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문화적 안목이 있었다.
서울에서 초고층 맨션을 분양한다고 초대해 가 본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 그 수십 층 맨션은 깔끔하고 세련미 넘치는 디자인,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뷰로 꿈에도 그리기 힘든 멋스런 집이었다. 그런데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지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날마다 그 집에서 살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서둘러 내려오고 말았다.
우리는 돈의 크기가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자랐다. 나는 초고가 한강 뷰 빌라와 초고층 맨션을 보고서 그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행복은 돈이 아니라 삶의 질을 중시하는 문화적 안목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하는 요즘이다. ‘문화적 안목’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문화는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그보다 더 높은 안목이 있겠는가.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돈을 더 사랑한다면 문화적 안목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려면 나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 깨끗한 물,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조용하고 평온하게 나를 살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나를 진정 위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문화적 안목의 시작이다. 문화적 안목이 낮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난한 삶,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돈이 많을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바쁘다는 핑계로 전시회 한번, 음악회 한번 가지 않는다. 맛집은 매일 찾아가도 책 한 권 사는 데는 인색하다. 얼굴 내미는 자리, 돈이 생길 듯한 자리는 찾아다니기 바쁘다. 음악회를 가더라도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얼굴 내밀기 위해서, 나도 그 유명한 사람의 연주 정도는 듣는 사람이라는 포장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눈을 위해서 간다. 문화적 안목이 낮으면 거액을 갖다 바치며 낮은 가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제 빈부격차는 돈의 크기가 아니라 안목의 크기를 기준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물질은 갈수록 풍요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진시황보다 더 풍부한 정보력, 더 편리한 생활로 더 빠른 운송수단과 소통, 엄청난 물질적 부유함 속에서 살고 있다. 진시황 시대로 내 스마트폰을 갖고 간다면 왕국 몇 개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내 집은 얼마, 네 집은 얼마” 하면서 돈의 빈부격차만 중시하며 살고 있다. 그래봐야 손꼽히는 부자들도 소음과 분진 속에 살고 있지 않던가. 이제는 돈의 빈부격차가 아니라 안목의 빈부격차, 문화의 빈부격차를 걱정할 때다. 문화적으로 가난하면 경제적으로 부유해질수록 더 가난한 삶을 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발행인 윤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