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윤학
중학교 졸업 후 연락이 없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향에서 방앗간을 하고 있다며 참기름을 보낸다고 했다. 어릴 때 그의 선한 모습이 스쳐 갔다. 그 얼마 후 그의 부음을 들었다.
언젠가부터 고향에 한번 가고 싶었는데 그의 부음을 듣고 마음을 정했다. 친구들이 세상을 뜨기 전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다고. 마침 함께 여행할 친구가 있어 목포를 거쳐 고향 섬마을로 향했다.
고향을 지키는 두 친구가 맞아주었다. 친구가 식당에서 된장을 푼 간재미 탕을 시켰는데 어찌나 맛이 좋던지… 열심히 먹고 있는데 한 친구가 신안군수 이야기를 꺼냈다. 민주당 아성인 전라도에서 무소속으로 세 번이나 군수에 당선돼 화제라고 했다. 어릴 적 이웃에 살았던 그가 떠올랐다.
초등학생 때 중1 형이 십여 명의 저학년 아이들을 리어카에 태우고 와 마을 어귀에서 한 명 한 명 내려주는 것이 아닌가. 가족도 아닌 동네 아이들을 위해 리어카를 끌고 오다니! 학교에서 우리 마을까지는 십여 리나 돼 어린아이들에게는 먼 길이라 리어카에 태워 온 것 같았다.
그 후에도 그가 재잘거리는 아이들과 정답게 이야기하며 리어카를 태워주는 모습을 몇 번 보게 되었다. 자신에게 이득 되지 않는 일에 적극 나서는 사람을 별로 본 적 없던 나로서는 그 형이 너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동화책에서만 읽었던 선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니! 섬을 벗어나 서울에서 변호사를 하면서도 나는 그의 소식이 가끔 궁금했다.
30여 년이 흐른 뒤 그가 무소속으로 민주당 후보를 꺾고 고향 신안군수가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리어카 끌던 그의 어릴 적 모습이 생생하게 스쳐 갔다. 나처럼 고향 사람들도 그런 모습을 보며 그에게 표를 준 것이 아닐까. 그가 중1 때의 그 봉사 정신으로 신안군을 이끌어 나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 높아지려고 아귀다툼하는 정치인들만 보아오던 내게는 그의 군수 당선이 희망으로 다가왔다.
학교에서 마을까지 십여 리 길, 저학년 아이들을 리어카에 태워주던 그가 30년 뒤 세 번이나 무소속으로 군수에 당선 되었다고
그다음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그를 공천하지 않았다. 고향 유력정치인이 자기 사람을 공천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그다음 선거에서도 또 당선되었다. 민주당 아성에서 무소속인 그를 알아보고 뽑아준 사람들이 이 나라에 있다는 것은 더 큰 희망이었다. 어떻게 살아왔기에 신안군민들이 그를 알아봐 준 것일까. 고향 친구가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어릴 적 나는 유행가 가락을 뿌리며 섬에 들어오는 여객선을 보면 육지로 나갈 수 있다는 기대로 부풀곤 했다. 그러다가 여객선이 육지를 향해 점점 멀어져가면 섬은 갑자기 적막해졌다. 어딘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섬사람들의 고립감, 나도 여객선이 떠나면 늘 그 고립감에 빠져들곤 했다.
섬사람들은 아침과 오후 딱 두 번 목포로 가는 연락선을 타야만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 밤에는 급한 환자가 있어도, 급한 볼일이 있어도 육지로 나갈 수가 없었다. 섬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일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박우량 군수가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에게 문제점을 거론하고 설득해 여객선 야간운행금지 규제를 풀었다. 섬사람들 모두가 수백 년 넘게 가슴에 품고 있었던, 밤이건 낮이건 육지로 나가려는 소망을 그가 이루어 준 것이다. 밤에도 육지로 나갈 수 있다는 그 불가능한 줄 알았던 꿈을!
그뿐 아니다. 세계적인 조각가들을 초청하여 섬마다 그 섬에 어울리는 조각미술관을 만들고, 특색있는 화초를 재배하여 온통 꽃으로 물든 섬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였다. 태양광, 풍력발전 회사들이 에너지로 얻는 이득을 주민들과 공유하게 해 섬 주민 한 사람당 매월 25만 원씩 지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가뭄으로 정부 보급품 나왔는데 소식 못 들은 외딴섬 주민들에게 일일이 전달 선거 나오자 그 주민들이 몰표 주어 당선
그를 한번 만나고 싶었다. 전화했더니 서울에 회의하러 갈 때 보자고 했다. 밝은 미소를 띠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찾아온 그는 여전히 중학생 소년이었다. 그의 꿈을 들어보았다. “섬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아 정말 행복한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며 “국회의원이나 장관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목포교대를 나와 몇 년간 교직 발령을 기다렸지만 교직희망자가 넘쳐 발령이 나지 않았다. 7급 공무원 시험을 쳐 증도면에 딸린 부속 섬의 출장소로 첫 발령이 났다.
당시 오랜 가뭄으로 논밭이 짝짝 갈라져 정부에서 보급품이 나왔는데 출장소 섬 주민들은 받으러 왔지만, 멀리 떨어진 외딴섬 주민들은 그런 소식조차 듣지 못해 받으러 오지도 못했다. 전임자들은 받으러 온 주민들에게만 보급품을 주고 말았지만, 그는 수십 개 외딴섬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보급품을 전달했다. 그런 공무원을 보지 못했던 섬 주민들은 감격하더란다. 삼십여 년 후 그가 군수 선거에 나오자 그 주민들이 몰표를 주어 계속 당선되더라고 했다.
그는 군민들을 위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무나 뿌듯해했다. 일흔이 다 되었다는 그에게서 그 어떤 청년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군민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그 열정, 그 사랑, 그 선함에 나도 행복해졌다.
세상에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사람을 무수히 만났지만, 그처럼 환한 미소로 자기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꿈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그는 떠나면서도 “고향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나하나 해나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그 어떤 대통령보다 높아 보였다.
내 고향 박우량 군수처럼 국민들을 위해 무얼 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저절로 행복해지는 ‘진정 높은 대통령’을 만나보고 싶다. 자리가 높다고 높은 사람은 아니다. 가치가 높은 일을 하는 사람을 높게 보는 시대가 열렸으면 한다.
발행인 윤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