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서율 서커스디랩 대표, 곡예사
열아홉 살, 진로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했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고 잘하는 것도 없었다. 그래도 스무 살이 되면 사회에 나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굉장히 컸다.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우동집 서빙, 피자집 설거지, 배달일도 했지만 삶이 단순노동으로 반복되는 것 같아 재미없어 좀 더 특별한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구인 공고를 보고 시급을 많이 준다는 이벤트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지하 조그마한 연습실로 내려가자, 사장님은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요술 풍선을 주고 입으로 불어 부풀리면 바로 취직시켜 주겠다고 했다.
온 힘을 다해 풍선을 불자 작은 공기 방울이 생기며 조금 부풀어 올랐다. ‘와! 취직할 수 있겠구나!’ 사장님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 풍선을 처음 입으로 불어 부풀릴 수 있는 사람은 100에 한 명이다. 내일부터 연습실에 나와라” 그렇게 취직하게 됐다.
내가 하는 일은 각종 파티나 행사에 피에로로 출장 나가는 것이었다. 일단 피에로를 하기 위해선 세 가지를 배워야 했다. 요술 풍선 입으로 불고 만들기, 피에로 분장 기술, 키가 커지는 스틸트 장비 타기. 그 연습실에서 처음으로 저글링을 만나게 되었다. 저글링을 연습하는 한 선배에게 평생 처음 해보는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는데 어찌나 행복하던지…
거기서 내 운명의 작품 ‘가말쵸바’의 공연 영상도 만났다. 두 일본 마임배우가 온몸으로 이야기하는데 관람객은 지구 반대편 외국 사람들이었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단순한 행위와 표현으로 서로 소통하고 즐거워하는 장면이 너무 멋있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나도 말을 사용하지 않는 넌버벌non-verbal 공연을 만드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렇게 내 공연 인생이 시작되었다.
더 다양한 저글링 기술을 배우고 싶어 유튜브에 딱 세 개 올라와 있는 저글링 영상을 수천 번 반복해 보면서 기술을 습득했다. 그중 정말 하고 싶은 기술은 ‘리버스 찹Reverse Chop’이었다. 그 기술을 하루에 5~8시간씩 한 달 정도 연습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포기하려던 순간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이라도 나와 한 약속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다. ‘이 저글링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진 않겠지만, 이 기술을 끝까지 도전해 보자’ 계속 연습해 3개월 만에 성공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와 한 약속을 지킨 첫 번째 순간이었다.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처음으로 공연할 기회가 찾아왔다. 어린이날, 15분 정도 되는 저글링 공연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10분 전엔 정말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무대에 올라 6개월간 준비한 공연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15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환호하는 관객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19년 평생을 살며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내가 노력한 어떤 가치를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아 본 순간이었다. 그때의 감격은 내 삶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
하지만 공연을 계속하면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해프닝을 만들고 있는 나의 삶 또한 반복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왜 공연하고 있지?’ 그 질문에 답을 해야만 했다. 나의 첫 다짐과 꿈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그 감각과 느낌을 작품으로 표현한 나만의 서커스 ‘My Dream’을 만들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광대는 사다리를 타고 아슬아슬 올라가야만 하는 높은 곳에 있는 화분에 ‘굳이’ 꽃을 심으려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한다. 잊고 있던 꿈을 다시 찾고 자신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잊고 있던 꿈, 혹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꿈을 보길 바랐다.
첫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그 긴 시간 동안 활동을 못 하니 수입도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물질적 가치를 초월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런 순간의 가치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무대에 올리는 작품에 혼을 담아내는 것 같다.
한번은 여의나루 공원 천상계단에서 거리공연을 준비할 때, 한 여자분이 계단에 앉아 있었는데 안색에 핏기가 없는 게 너무 위태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