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숙
前 HSBC 지점장, 체이스은행 PB
사장도 용돈 타 쓰고 금고 맡겨
미국에서 유능한 금융계 인물이 되셨는데 어떻게 미국에 가게 되셨어요?
저는 친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이모가 저를 데려다 수양딸로 키우게 되면서 이모부가 양아버지가 되셨죠. 양아버지는 불란서 분이셨어요. 외교관으로 한국에 오셨을 때 이모를 만나 결혼한 거죠. 양아버지는 내가 도서관 가면 예쁜 딸 납치당한다고 같이 따라오는 분이셨어요. 제가 4시간 공부하면 당신도 4시간 공부하셨어요.
한 번은 돈 많은 집 애들만 와이로 먹고 반장 시키는 것 같아 선생님한테 교육자가 왜 그러냐고 말대꾸를 했어요. 그 선생님한테 대들어 따귀를 몇 대 맞고는 ‘내가 이 학교는 죽어도 안 다닌다’ 하면서 결석을 내리 한 열흘 했어요. 그랬더니 외교관이었던 양아버지가 미국으로 절 데려가게 된 거예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모부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어요. 중환자실이라서 못 들어가게 하니까 막 난리를 쳤어요. “우리 아빠 옆에 있겠다는데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고.
동양애가 불란서 사람한테 아빠라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이상한 눈으로 봤죠. 아버지가 죽음이 임박해서 피부가 새파랗게 변하더라고요. 저는 아버지보고 계속 일어나라고 하고… 열흘 만에 돌아가셨지요.
양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 같아요.
본래 소르본 대학 나와서 아빠처럼 외교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다 무산됐지요. 공부니 뭐니 다 집어치우고 대학 안 간다고 했더니 “너무 아깝다. 네가 뭐가 모자라서 안 가냐?”면서 교장선생님이 저를 NYU뉴욕대학교에 추천서도 써주셨지요.
당시 NYU 등록금이 2만5천 불이었는데 백화점에서 일하던 어머니 연봉이 2만5천 불이었어요. NYU에서도 장학금을 8천 불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만7천 불은 내야하잖아요. 나는 그냥 뉴욕의 시립대학교인 ‘퀸스 칼리지’를 갔어요.
학비는 야채가게 카운터를 보며 마련했어요. 거의 서서 일하는데 어깨가 다 빠져나갈 지경이지요.
당시에는 미국사람들이 두부가 뭔지 몰랐어요. 할머니한테 들은 대로 “노란 콩을 몇 시간 물에 불려서 맷돌로 갈아서… 단백질 풍부하고 다이어트 하는 데 끝내주고…”
그렇게 설명해주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두부만 사려고 해요. 그러면 “두부만 먹으면 맛이 없다. 간장에 참기름 넣고 파 송송 썰어 마늘 넣고 깨소금 넣고 찍어 먹으면 맛이 최고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두부도 사고 참기름도 사고 깨소금도 사고… 몇 가지를 팔아요. 그걸 크로스셀cross-sell이라고 하지요.
제가 그 가게에서 처음으로 사과를 즉석에서 기계에 갈아서 파는 ‘애플사이다’를 시작했어요. 손님이 항상 출입문까지 줄을 섰지요. 그래도 그 많은 손님들 계산을 5분 안에 다 소화해요. 봉지에 착착 담아주고, 계산하면서 농담도 하고… 제가 하루 매출을 만3천 불씩 찍었어요.
한번은 <뉴욕타임스> 기자가 와서 묻길래 한국 음식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를 했더니 <뉴욕타임스> 겉표지에다가 내 사진을 실었더라고요.
뒤로 그 야채가게가 더 유명해졌어요. 매상이 팍팍 오르니까 저를 최고대우해 주었어요. 주급 350불에 하루 세끼 다 먹여주고. 대학생으로서는 그때 제법 큰돈을 모았어요.
야채가게가 사실 가장 밑바닥 생활이에요. 오래 하면 사람이 거칠어져요. 나 빼고는 다 남자분들인데 거의 홀아비들이에요. 야채 같은 거 버리면 아까우니까 주워다가 된장찌개 끓여서 아저씨들 주고, 과일은 썩은 부분만 싹 버리고는 제가 먹고 그랬어요.웃음
돈이 제법 모이길래 불란서 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했어요. 제가 불란서로 공부하러 간다니까 사장님이 이익의 50%를 주고 돈 하나도 안 대도 좋으니까 동업하자고 했어요. 돈도 중요하지만 꿈이 얼마나 소중해요. 결국 그렇게 가고 싶었던 불란서에 가서 1년을 공부했지요. 만약 불란서 안 가고 같이 야채가게 했으면 저는 진짜 재벌 마님 안 부러울 정도로 돈 많이 벌었겠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