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광룡 변호사

초임 판사 시절, 형사 재판기일이 지정되어 공소장과 증거 기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강도 전과 3범이 공범을 끌어들여 범행 현장 사전 답사를 하고, 기업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 경비원들을 협박하여 철삿줄로 묶어 놓고 준비한 산소 용접기로 금고를 뜯어내어 현금을 강취했다. 정말 엄중한 강력 사건으로, 주범은 그야말로 흉악범으로 느껴졌다.
피고인의 인적 사항을 자세히 보니 본적이 나의 고향 동네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피고인은 어릴 때 이웃에 살면서 나와 아주 가까이 지내던 고향 동생임이 틀림없었다. 너무 놀라 재판 회피를 하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1회 공판기일 후 직전 민사 재판부에서 재판장으로 모셨던 부장판사를 찾아갔다.
초임 판사 시절, 엄중한 강력 사건 주범을 보니 어릴 때 가까이 지내던 고향 동생
너무 놀라 재판 회피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부장판사를 찾아가…
그분은 “법대로 재판하되 그 피고인을 따로 불러 재판 과정을 설명하고 중벌을 내리더라도 양해하라는 언질을 미리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라고 조언해 주셨다. 나는 재판장께 사실을 고하고 그 피고인을 심문실로 불렀다. 그러자 그 피고인도 매우 놀라 부끄러워하였다. 법정에서는 미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범죄자라도 법정에서 판사들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닌가 보다 싶었다.
나는 “자네가 저지른 범죄가 중범죄란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따라서 내가 재판을 한다 하더라도 특별히 봐 줄 수는 없다. 무거운 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내가 너에게 보통의 경우보다 불리한 재판이야 하겠느냐? 위험한 교량을 걸어갈 때 새끼줄이라도 처져 있으면 그걸 실제 의지하지 않더라도,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가질 수는 있지 않느냐? 내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이 재판부에서 내리는 형을 네게 가장 적당한 형이라고 생각하고 달게 받기 바란다. 다시는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너무도 부끄러워하며 다시 이런 일을 저질러 법정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재판부에서 최종 형량을 합의하는데 상황에 따라서 형량 판단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절감했다. 내가 맨 처음 기록을 봤을 땐 그렇게 중한 사건으로 보이던 것이 그 녀석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에는 희한하게도 뭐 ‘별거 아닌 사건’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의 의견이 객관성을 잃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재판장의 의견을 존중하여 형을 선고하게 되었다.
그 후 그 피고인은 깊이 뉘우치고 모범수로 복역하였고, 복역 중 익힌 기술로 출소 후 생업에 종사하여 돈도 잘 벌고 원만한 가정도 꾸리고 훌륭한 사회인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이 일을 겪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객관적으론 정말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지만 어떤 계기로 개과천선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그래서 객관적인 눈으로 범행만 보고 재판을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닐 것이다.
하광룡 변호사
前 부장판사, 서울대 법과대학 졸
하광룡의 안전한 법률 진행,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