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경
호강은 시켜주지 못해도 속상하게 하지는 않겠다는 남자의 말에 홀려 덜컥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가 두 분이나 생겼다. 시어머니와 양시어머니… 남편이 아들 없는 큰집의 양자였기 때문이다.
남편과 결혼 이야기가 오갈 즈음 양시어머니는 시댁 식구들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는 주택을 남편과 상의도 없이 팔고 절반 가까운 금액을 양시누이에게 주었다. 집 판 돈 절반으로는 서울은 고사하고 경기도에 있는 다세대주택 구입도 어려웠다. 결국엔 대출을 받고도 부족해 친시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했다. 친시부모님은 돈을 보태면서 집 명의를 남편 이름으로 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주마 하셨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 집은 양시어머니 이름으로 등기가 되었다. 그래도 새살림을 들여놓을 때는 평생 걱정 없이 살겠지 생각하며 행복했다.
그렇지만 문득문득 나중에 이 집이 시누이에게 갈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대출금 이자가 남편 통장에서 나가고 있었고 남편도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길래 자꾸 얘기를 꺼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양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집 명의가 시누이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우리 가족은 느닷없이 길거리에 나 앉는 처지가 되었다.
부엌 하나 달린 작은 방을 간신히 구해 계획에 없던 이사를 했다. 앞으로도 세 아이와 2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닐 생각을 하니 앞이 막막했다. 어느 날 아파트 분양 광고가 눈에 띄었다.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한 듯이. 아이를 둘러업고 분양사무실을 찾아가 청약신청을 했다. 그렇게 온전히 우리 가족의 힘으로 처음 집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부부 공동명의가 흔하지 않아 남편 이름으로 등기를 했다. 그런데 남편은 본인 명의로 된 집이 생기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인지 보증 서 달라고 하면 척척, 돈 꿔 달라고 하면 대출까지 받아서 척척 꿔주었다. 결국 대출 이자를 매달 갚지 못해 은행에서 아파트를 경매에 넘기겠다는 우편물을 보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은행에 이자부터 갚을 테니 경매에 넘기지 말라고 사정했다. 놀랍게도 은행 담당자에게 나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경매에 내놓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겨우 그 집을 제자리에 돌려놓았건만, 결국 남편은 결정타를 날리고 말았다. 가격을 좋게 받아주겠다는 집 근처 부동산의 꼬드김에 나와 상의도 없이 덜컥 집을 팔고 온 것이다. 나 원 참. 기가 막혔다.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방 한 칸 없는 처지가 되었구나’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러다 흰물결아카데미 <돈과 영성> 강의에서 한 직원이 집을 사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집값이 떨어질 것이니 전세를 살라는 뉴스가 연일 나오던 시절, 대표는 그 직원에게 오히려 지금 집을 사야 한다고 얘기했단다. 돈도 없고, 집값이 떨어질까봐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직원을 설득한 끝에 융자를 내어 집을 사게 했는데 아파트값이 몇 배로 올랐단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집을 살 수 있는 줄 알지만 집값이 떨어질까봐 못 사요. 하지만 손해를 보더라도 이 집이 가족에게 정말 필요한 집이라고 생각하면 용기 내서 살 수 있어요. 이렇게 더 가치 있는 필요성이 있으면 경제성도 움직이게 돼요”
그 강의를 듣기 전에는 빚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저 두렵고 싫어서 막연히 돈을 더 모아서 사야겠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강의를 듣고는 ‘아! 나도 서울에 집을 살 수 있겠구나’ 용기가 생겼다. 은행에서 대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래, 일을 저지르자! 이곳저곳 집을 보러 다녔다. 주변에 공원도 있고 조용한 집을 만났다. 아이들도 모두 그 집을 좋아했다. ‘필요성’으로 집을 사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남편은 그동안 저질렀던 일들이 미안했던지 이번엔 전적으로 내 의견에 따랐다. 망설임 없이 계약을 했다.
마음고생하면서도 묵묵히 받아주는 내가 고마웠는지 남편은 새사람이 되었다.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던 남편이 이제는 청소는 물론 요리에 분리수거까지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편 덕에 ‘서울에 집 있는 여자’가 된 것이다.
권수경